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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씨부인을 모신 일월산의 산령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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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석 담장을 두른 학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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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삼지리모전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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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변천의 물길이 휘어 흐르는 자리에 1000년이 넘도록 우뚝 서 있는 영양의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B%B4%89%EA%B0%90%EB%AA%A8%EC%A0%84%EC%98%A4%EC%B8%B5%EC%84%9D%ED%83%91&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봉감모전오층석탑. 초겨울의 정적 속에서 단정하게 서 있는 탑은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화려한 꾸밈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장대한 위용과 그윽한 자태에 감탄하게 된다.

# 단정하면서 그윽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다

경북 영양의 반변천 물길을 낀 넓고 야트막한 구릉. 물 건너편에 낮은 병풍처럼 석벽을 둘러친 곳. 거기에 그 탑이 있다. 봉감모전오층석탑. 먼저 그 이름부터 풀어보자. 우선 '봉감'이란 탑이 선 마을의 이름. '모전(模塼)'이란 '전탑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전탑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그런데 이 탑은 돌을 흙으로 구운 게 아니라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내 전탑처럼 지었으니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오층석탑'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다섯층을 가진 석탑이란 뜻이다.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아올린 탑은 화려하지 않다. 높이 11m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탑은 석가탑처럼 유려하지도 않고, 다보탑처럼 귀족적인 품격을 가진 것도 아니다. 봉감모전오층석탑은 날렵한 풍모의 이런 탑과는 미감이 전혀 다르다. 탑의 표정은 어찌 보면 무뚝뚝하다. 하지만 소박하면서 간결한 형태가 더없이 단정하다. 붉은 기가 도는 흑회색의 기운도 자태와 썩 잘 어울린다. 주변은 너른 구릉의 평지가 펼쳐져 있고, 탑 앞쪽에는 까치밥을 매달고 있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뒤편에는 나뭇잎을 다 떨군 당당한 느티나무 거목이 풍경을 돋보이게 한다.

뒤로 여러 발짝 물러서서 탑을 바라보면 너른 들에 1000년이 넘도록 서 있는 석탑과 몇 그루 나무들, 그리고 반변천 건너로 뼈대를 드러낸 갈모산 석벽의 풍경까지 합쳐지면 그야말로 그윽한 정취를 빚어낸다. 억새를 두른 반변천의 물길의 흐름은 침묵처럼 유장한데, 먹이를 찾는지 건너편 산자락의 노루 울음소리만 간혹 물을 건너온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D%86%B5%EC%9D%BC%EC%8B%A0%EB%9D%BC%EC%8B%9C%EB%8C%8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통일신라시대 때의 탑의 모습은 어땠을까. 탑의 각 층의 낙수면에는 기와가 곱게 입혀졌을 것이고, 네 귀 끝에는 바람에 뎅그렁거리는 풍경이 매달려있었을 것이었다. 오랜 세월에 기와는 부서졌고, 풍경은 떨어져 나갔지만 이런 장식 하나 없이도 탑은 이렇듯 아름답다.

영양 땅에는 모전탑이 두 기가 더 있다. 우리 땅에 남아있는 모전탑이 모두 10기라는데, 그 중 세 기의 탑이 영양에 있는 셈이다. 봉감모전석탑에 이어 꼽을 수 있는 것이 삼지리모전삼층석탑이다. 산자락의 중턱쯤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탑은 암반 위에 굴러내린 큰 바위를 석탑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석탑을 절묘하게 지어 올렸다. 지금은 이층만 남아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바위로 쓴 기단의 높이가 더해져 제법 웅장한 맛을 낸다. 현리에도 '현동모전오층석탑'이 있다. 7m에서 한 치쯤 빠지는 높이라 봉감의 것보다 장대한 맛은 훨씬 덜하지만, 문주석에 새겨진 당초문양이 눈길을 끈다.

기왕 탑 구경을 나섰다면 현일동삼층석탑까지 함께 둘러보자. 31번 국도의 고가도로 아래쪽의 너른 들에 동그마니 놓여있는 이 탑은 몸체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82%AC%EC%B2%9C%EC%99%9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사천왕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마모되긴 했지만 돋을새김이 아직도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면, 처음 새겨졌을 때는 얼마나 더 정교하고, 빼어났을까.

# 반변천을 따라가며 만나는 산촌마을의 정취

영양을 굽어 흐르는 반변천은 척금대의 곡강팔경(谷江八景)을 비롯해 옥선대, 비파담, 세심암, 초선대와 같은 명소들을 두루 만들면서 흘러내린다. 그 중에서도 반변천이 가장 절경을 만들어 내는 곳은 남이포와 선바위 일대다. 남이포는 반변천과 창기천의 물길이 한데 모이는 합수(合水)지점이다. 양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면서 Y자 모양의 지형이 만들어졌는데, 두 물길이 합수부의 지형을 예각으로 뾰족하게 깎아내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졌다. 이 지세의 주변을 일컬어 남이포라 부르고, 남이포에서 물 건너편에 송곳처럼 우뚝 솟아있는 기암을 선바위이라고 부른다.

이런 특별한 지형에 전설 한 자락이 어찌 없을까. 남이포에 전설 같은 이야기 한 토막. 남이포 인근 연못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이 역모를 꾀해 반란을 일으켰단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용을 토벌하기 위해 급히 남이장군을 파견했다. 남이장군은 치열한 교전 끝에 용 두 마리의 목을 베고는 석벽에다 자신의 초상을 검 끝으로 새겼단다. 그리고 한양 땅을 돌아가려다가 지형을 보니 언젠가 다시 도적의 무리가 일어날 기세라 큰 칼로 산맥을 잘라서 물길을 돌렸다. 선바위가 남이장군이 마지막으로 칼질을 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남이포와 선바위 일대는 일찌감치 풍경을 앞세운 관광지로 개발됐지만, 영양 땅이 워낙 깊다 보니 찾는 이들은 거의 없어 '관광지'라 이름 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선바위관광지에는 분재와 수석, 야생화 등을 모아 전시하는 전시장이 있고, 남이포의 뾰족한 끝자락에 세운 정자 남이정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 석문교도 있다. 바람이 차가운 날만 아니라면, 석문교를 건너 남이포의 물가를 따라 남이정까지의 산책을 추천할 만하다.

반변천의 정취는 영양 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즈음 수량이 줄기는 했지만 영양읍에서도, 반변천 상류의 일월면과 수비면 곳곳에서도 물길이 깎아놓은 석벽의 벼랑과 맑은 물빛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맑은 반변천의 물길을 길잡이 삼아 따라가다 보면 학초정, 약천정, 월담헌 같은 시간의 깊이가 묻어나는 영양 땅의 내로라하는 옛 고택과 정자들을 지나고, 초겨울 빈 밭에다 수확을 끝낸 콩대나 고춧대 따위를 쌓아놓고 태우는 평화로운 산촌마을도 지나게 된다. 영양은 한때 인구 7만을 헤아리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 인구는 고작 1만8000여 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를 이기는 방법은 '서로의 체온'이다. 이들이 어떻게 함께 체온을 나누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영양읍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98%A4%EC%9D%BC%EC%9E%A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오일장을 찾아가보면 알 일이다.

남이포 관광지 인근에는 산촌생활박물관도 있다. 산촌생활에서 쓰던 이런저런 것들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굳이 박물관을 찾지 않더라도 영양 사람들이 견뎌온 산촌의 삶이 과거에 얼마나 고단했는지는 지명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영양에서 영덕 쪽으로 넘는 고개가 읍령(泣嶺)이고, 청기면에서 영양읍으로 향하는 고갯길은 행곡령(行哭嶺)이다. 고갯길을 이름에 '울 읍(泣)'자나 '통곡할 곡(哭)'자를 넣은 연유가 이렇다. 영양 땅을 다스리던 영덕 영해부 관리들의 수탈로 곡식을 지게에다 짊어지고 험한 고갯길을 넘어 동해바다까지 왕복 200리, 멀게는 300리를 오가야 했단다. 저 먹을 것은 물론이고, 자식조차 굶기던 시절, 수확한 곡식을 지고 관리들에게 바치러 가는 길에서 어찌 울음이 터지지 않고, 곡소리가 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일월산에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신부를 만나다

'영양군민의 노래'의 두 번째 소절은 '반변천 맑은 물…'이다. 그렇다면 첫 마디는? 당연히 '일월산 높은 뫼…'다. 영양의 군민헌장도 '우리는 일월산 정기를 받아…'로 시작한다. 그만큼 일월산은 영양의 중심이다. 그건 해발고도가 1219m로 경북 지역에서 소백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란 이유도 있지만, 일월산이 내뿜는 '강한 기운' 때문이기도 하다. 일월(日月)이란 이름은 해와 달이 솟는 것을 가장 먼저 바라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 정상에 천지와 같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형태가 해와 달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월산에는 도처에 굿당들이 있다. 무속인들은 일월산을 음기가 강한 '여성의 산'으로 친다. 무속인들 사이에서 그믐날에 일월산에서 내림굿을 하면 점괘가 신통해진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믐이면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이곳 일월산을 찾아오는 이유다. 일월산을 찾는 무속인들이 모시는 신이 바로 '황씨부인'이다.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84%9C%EC%A0%95%EC%A3%BC%20%EC%8B%9C%EC%9D%B8&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서정주 시인의 첫 시집인 '화사집'에 실린 시편 '신부'에는 신혼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도망간 간 신랑을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기다리고 있다가 재가 돼서 무너지고만 신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신부가 바로 일월산의 황씨부인이다. 일월산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이야기를 들은 시인이 그 이야기를 시로 담아낸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황씨부인 이야기의 후속편. 뒤늦게 찾아온 신랑이 죽은 아내(황씨부인)를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짓고 돌로 부인 모습을 쪼아 석상을 만들고 조석으로 봉양했다. 그러다 돌신부 옆에서 눈을 감았고 이후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82%B0%EC%82%AC%ED%83%9C&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산사태가 나서 사당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부산에서 한 아낙네의 꿈에 황씨부인이 나타나 '나를 찾아서 섬기라'는 말을 전한다. 이에 아낙은 일월산을 찾아와 초막을 짓고 거주하다 웅덩이에서 족두리를 쓴 석상을 발견하고 석상을 섬기면서 용한 무당이 됐다는 이야기다.

일월산은 거의 9분 능선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영양읍에서 봉화방면으로 31번 국도를 타고 가다 영양터널을 지나서 왼편으로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8B%9C%EB%A9%98%ED%8A%B8&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시멘트 포장길을 따라가면 황씨부인을 모시는 황씨부인당 앞을 지나 군부대 입구에 당도한다. 일월산 정상인 일자봉은 여기서 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30분 남짓이면 당도한다.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86%8C%EC%82%AC%EB%82%98%EB%AC%B4&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소사나무와 참나무 군락이 시리게 서 있는 겨울 숲을 따라가면 그 끝에 동쪽을 향해 시선이 탁 터지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서면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D%83%9C%EB%B0%B1%EC%82%B0%EB%A7%A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1128145106414" target=new>태백산맥의 등뼈가 첩첩이 겹쳐지는 풍경이 자못 장엄하다. 맑은 날이면 여기서 동해바다와 울릉도까지도 보인다는데, 아무래도 그건 과장인 듯하다. 하지만 바다가 안보인데도 어떠랴. 뼈대가 드러난 겨울산의 장엄한 풍경만으로도 거기까지 간 보람은 충분하니 말이다. 마침 산정에는 올겨울 들어 첫눈이 아우성처럼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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